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(문단 편집) == [[이슬람 근본주의]]자 == 그의 하루 일과는 다음과 같았다. *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난 후 원고를 집필하고, 편지를 쓰고 읽었다. * 외국어 신문 읽기가 끝나면 아침 기도를 올렸는데 이게 새벽의 주요 일과. * 아침 식사는 7시에 시작하여 9시까지는 이란의 신문을 읽고 뉴스를 들었다. * 이후 10시까지 휴식을 취하다 다시 기도를 올리고 12시에 점심을 먹었고, 2시부터 3시까지는 낮잠을 잤다. * 자고 일어난 후에는 일하는 생활을 반복했다.[* 이러한 생활은 망명지에서도 이어져서 망명지에서도 이란의 혁명을 지휘했고 이 와중에도 기도는 매일 드렸다고 한다. 심지어 업무를 보는 중간에도 계속 기도를 올렸다고.] * 저녁은 9시가 되어서야 간단하게 먹었으며, 오후 11시에 자기 전까지는 외국의 페르시아어 방송, 특히 [[BBC]]를 즐겨 들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모범적이고 성실한 생활과 윤리 원칙을 중요시하는 그의 태도에 집권 초반의 인기는 실로 엄청났지만, 지독하게 이슬람 광신주의를 주장했다는 점이 문제였다. 이 점 때문에 이란 밖에서도 엄청난 비판을 받는다. 게다가 자신에 반대하는 자는 절대 용서하지 않아서, 이란 신정정권에 반대하는 자유인사들 및 정적에 대한 [[고문]]이나 [[사형]], [[암살]]도 빈번했다. 당시 이란에서 [[팔레비]]가 천단위의 사람을 잡아넣고 사람들을 고문했다면 호메이니는 '''십만단위로 잡아넣고 죽인 셈'''이다. [[이슬람 근본주의]]의 종특인 '''여성 차별'''도 빠지지 않았다. 한 예로 [[https://ko.wikipedia.org/wiki/시린_에바디|시린 에바디]][* 2003년 [[노벨 평화상]] 수상]는 [[팔레비 왕조]] 시절 [[판사]]로 일했지만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자 여자는 법관이 될 수 없다는 근본주의 논리에 따라 비서로 강등당했다. 그리고 처녀들을 죽이는 일은 금지되어 있었지만 수많은 처녀들이 총살되었다. 어떻게 된것인가 하면 처형 전날 혁명 수비대원과 '''억지로 결혼을 시킨 다음에 [[강간]]을 하여 [[순결|처녀성]]을 빼앗아 "[[처녀]]가 아니다! 처형할 수 있다!"'''라고 꼼수를 부린 것이다. 그리고 아주 적은 양의 '[[지참금]]'이 처형된 처녀의 집에 보내졌다. 만화 [[페르세폴리스(만화)|페르세폴리스]]에서 어느 [[공산주의자]] 소녀가 혁명 수비대에 체포된 후 처형되었을 때 강제결혼 후 [[성폭행]]을 당하고 처형당한 이유가 이 때문이다.[* 그리고 그렇게 끔찍하고 반인륜적으로 죽이고 난 후 남은 가족들에게는 위로금이랍시고 500투만(5000리알)을 건네주었다고 한다. 5000리알은 현재 한국 원과의 환율을 비교하면 140원에 불과한 돈이다. 거의 40년 전 일이기는 해도 이슬람 혁명 직후로 리알화 가치가 폭락했기 때문에 그 때도 많은 돈은 절대 아니었다.(약 3만 원 정도.) 무엇보다 단지 공산주의자였을 뿐인 무고한 소녀의 목숨의 가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푼돈인 것이다.] 또한 이러한 처형 과정에서도 비인간적인 행위가 벌어졌다는 것이 확인되었는데, 파리에 본부를 둔 국제인권연맹은 이란 당국이 사형선고를 받은 정치범들의 피를 빼내 부상한 군인들에게 [[수혈]]한다고 폭로한 것. 보도에 의하면 이란 정부가 일부 정치범을 완전히 피를 짜내는 방법으로 처형하고 있으며, 일부는 총살형을 당하기에 앞서 혈액일부를 헌납토록 강요당하고 있다. 이에 대한 증거로 이란 검찰총장이 각 지방검찰청에 발송한 공문서 사본을 인권연맹이 1980년대에 비밀리에 입수했는데, 이란의 검찰총장이 작성한 후 서명한 이 문서에서 "믿을만한 의료진이 사형선고를 받은자들의 피를 비밀리에 빼내줄 것"이라고 씌어있었는데, 타임즈에 따르면 이 문서가 호메이니가 이같은 지시는 [[샤리아|회교율법]]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말했던 사실로 보아 호메이니의 지시라고 판단된다는 주장을 했다.[* [[http://isplus.live.joins.com/news/article/article.asp?total_id=1714459&cloc=rss|isplus|soccer|기사]]] 해외 기업의 진출도 대부분 무산되었다. "그래도 팔레비 왕조보다야 낫지 않나?"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, 사실 반대파 억압은 이쪽이 한술 더 떴다. 그리고 당연히 세계 인권 단체에서 호메이니는 '''지금도 비난받고 있다.''' 또 혁명 이후 이란의 대학들을 폐쇄한 뒤, 자기가 만든 이슬람 혁명 이념에 맞게 커리큘럼을 갈아엎고 다시 문을 열면서, 남녀공학[* 고등학교까지는 남학교와 여학교가 분리되며, 대학은 남녀분반이다.(출처: 마르잔 사트라피. <페르세폴리스> 하권142 페이지)]을 없애는 등 서구 문물을 일방적으로 배척한다는 명분으로 시대착오적인 일들을 많이 하였다. 특히 아동 인권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그의 집권 시절 이란군에서 소년병을 징집하여 [[자폭|지뢰 제거에 투입]]된 극악한 범죄에도 책임을 피할 순 없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